한미수필문학상은 본지가 지난 2001년부터 진행해 온,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수필공모전이다.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를 주제로 하고, 청년의사 독자들에게는 신년호의 1면을 장식하는 것으로도 익숙하다. 새해 첫날만은 동료가 전하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다.
매년 수필 원고를 받고, 수상자를 선정하고, 후원사인 한미약품 건물에서 조촐한 시상식을 진행한다. 지금까지 아홉 번, 수상작 120여 편이 신문 지상을 통해 독자들을 찾았다.
기자 역시 한미수필의 열렬한 독자인지라 모든 작품을 읽고 있는데, 올해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한 편은 유난히 기자의 관심을 끌었다. 채명석 원장이 쓴 ‘인연-인연이란 마음이 내는 길이다’였다.
이 글은 2003년에 우수상 수상작이었던 ‘겨울나무’의 뒷이야기였다. ‘겨울나무’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낳은 노숙자 여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봉사자들의 사랑을 받은 아이를 앵벌이에 애용하는 여자에 대한 분노, 그러나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답답함이 살아 있는 글이었다.
채 원장은 7년이 흐른 후, ‘인연’으로 이후 소식을 전해왔던 것이다.
“원래 이 내용으로 글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작년 말 한미수필문학상 담당 기자의 홍보 메일을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벽에 붙여놓은 아이 사진과 눈이 마주쳤죠.”
그렇게 한번에 써내려간 글로 다시 우수상을 받았다. 사진 속 아이는 13년 만에 얻게 된 넷째이자 막내아들이다. 시상식장을 깔깔대는 웃음소리로 가득 채웠던 아이는 이제 36개월, 벽만 보면 물구나무를 서고, 머리가 허리 옆 혹은 다리 사이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개구쟁이다.
상을 받기 위해 서 있는 아빠에게 끊임없는 ‘아빠아빠아빠아빠...’ 공격(?)을 쏟아 부어 채 원장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 막내는 바로 7년 전 노숙자 여인이 가져다준 인연이다.
두 번째 기회를 만나다
자신이 낳은 젖먹이를 앵벌이에 이용하던 노숙자 여인은 자취를 감춘 지 4년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출동SO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앵벌이를 위해 이용되던 아이는 이제 엄마 옆에서 함께 앵벌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와 격리돼 아동보호시설에 입소하게 됐고, 채 원장과 이 아이의 인연을 알고 있던 시설 사회복지사는 채 원장에게 연락을 했다. 아이는 영양결핍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발달 장애를 갖고 있었다. 채 원장 가족은 가족회의를 거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당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무력감을 기억하고 있던 채 원장에게, 그 아이가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인지도 몰랐다.
채 원장 부부는 시설로 찾아갔다. 그리고 10개월 된 다른 아기가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부는 두 아이를 모두 집에 데려오고 싶었지만, 채 원장 부부에겐 세 형제가 있었다.
위탁가정은 규정상 아이를 네 명 초과할 수 없다. 마음이 아팠지만 우선 손을 더 필요로 하는 10개월 아이를 데려왔다. 2년 후 원래 데려오려 했던 아이가 다른 위탁가정에서 시설로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채 원장은 지금 16살인 첫째가 18살이 되는 2년 후(18세 이상 자녀는 ‘네 명’ 기준에서 빠진다) 다른 아이도 데려오리라고 마음먹는다. 9회 수상작인 ‘인연’의 내용이다.
개구쟁이 막내, 집안을 평정하다
시상식에는 ‘인연’의 세 주인공이 자리를 함께 했다. 멀리 부산에서 온 아이와 채 원장 부부는 기차와 지하철로 네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아이가 토했을 정도니 꽤나 힘든 여정이었지 싶다. 하지만 곧 기운을 차린 아이는 시상식 내내 아빠, 엄마를 불러댔다.
아이에게는 친부가 있다. 그래서 입양이 아닌 위탁이다. 성을 바꿀 수도 없고, 친부가 아이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두말 않고 내줘야 한다.
아이가 집에 온 후 세 아들은 막내와 놀아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집에서는 방문 걸어 잠그기 일쑤인 또래들에 비해 거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순전히 이 개구쟁이 막내 덕이라고 채 원장은 생각한다.
그 역시 퇴근 후는 집으로 직행이다. 주말은 물론이다. 식구들의 도움이 있어도 정신없이 설치는 사내아이를 온전히 돌봐야하는 것은 아내 조재화 씨. 세 아들을 키운 것만으로도 아이라면 손사래일 텐데 조재화 씨는 넷째 아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제가 잘하는 것이 이것밖에 없는 걸요, 호호.”
‘부산여자’ 답게 시원스런 말투로 얘기하는 조 씨다. 물론 몸을 꼬아 비트는 막내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은 채다. 내려뒀다가는 아빠 앞에 놓여 있는 녹음기가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를 터다.
조재화 씨와 채명석 원장은 동갑내기로 결혼 전 부산 한 후미진 동네에서 각각 3년간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채 원장은 공부방에서, 조 씨는 비영리탁아소에서였다. ‘잘하는 것이 아이 보는 것밖에 없다’는 말은 이런 경력에서 나온 것이다.
“다 인연입니다”
위탁아동은 언제든 위탁가정에서 시설로 돌려보내질 수 있고 친부모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 전자는 아이에게 충격이고 후자는 위탁가정에 충격이다. 정을 붙이고 살던 아이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그래서 친척 등 연고 있는 아이를 위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채 원장처럼 연고 없는 아이를 맡는 이는 전국적으로 1,200여명에 불과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아이에게 정을 주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위탁아동들은 편부모인 경우도 많고 부모가 교도소 들어가면 위탁가정에 있다가 나오면 부모에게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아이들은 하루하루 사랑을 쏟아주는 것으로 충분해요. 주말에 잠깐 시간 내서 교육도 받고 얼굴 익히고 때로 주말에 집에 데려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마음이 쏠릴 때가 있을 거예요. 몇 십 년 뒤를 생각하지 말고 이 아이에게 어떤 하루를 만들어 줄까를 고민하면 됩니다. 어차피 우리 막내 뿐 아니라 큰 아이들도 언젠가는 제게서 떨어져나갈 것 아닙니까. 제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요. 늦으냐 빠르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채 원장이 데려오려던 아이는 시설에 돌아왔다가 얼마 전 외삼촌 집으로 갔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잘 된 일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인연이다. 7년 전 태어나는 것을 봤던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막내를 만났고 아이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이 아이도 원래 성이 채씨인데 괜히 그런 것까지도 인연이다 싶어요.”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아이라 운동을 시켜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힘든 건 시키기 싫단다. 대신 오랫동안 대금을 배운 채 원장은 조만간 막내에게 대금을 가르칠 생각이다. 국악연주회를 많이 데려갔더니 판소리 등에도 관심이 많단다.
“하려고 하면 국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할 생각도 있고요, 하하.”
오랫동안 배워온 대금을 아이 때문에 한참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함께 마음껏 대금 불 생각을 하는 듯 채 원장의 얼굴빛이 밝다.
그제야 아이의 이름을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채**입니다. 어이, 채**!” **이는 대답 대신 “아, 채**!”하며 혀 짧은 발음으로 아빠의 말을 따라한다. 아버지의 눈이 반달처럼 웃음으로 젖어든다.
예쁜 단발머리를 한 **이의 반달눈과 아빠의 반달눈이 거짓말처럼 닮아 있었다.
